죽은 숙녀들의 사회
🔖 누워 잠 못 이루던 밤들, 내가 걸지 않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윌리엄 제임스가 나타나기를 바라던 밤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좀더 나이들고 좀더 자신있는 모습으로,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때로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가만히 앉아 내가 잠들 때까지 담요 아래로 발을 주물러주곤 했다. 때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은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 깊고 깊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제임스는 상냥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어스름이라고 생각해라. 땅을 보고 길을 찾기가 무척 어려울 때지. 앞으로 어둠은 더 짙어지겠지만 그땐 하늘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제임스는 어스름 속을 헤매다가 문득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직접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철학적 개념이었지만, 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자신에게 강요된 믿음을 거부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게 순전히 우연으로만 여겨지진 않는다. “내가 처음 자유의지로 행한 건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 그날 제임스는 일기에 적었다. 북극성을 처음 찾은 날이었다. 그는 그러고도 몇년을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우울감에 젖어 있었지만 방향만은 잡고 있었다.
🔖 레프 톨스토이가 아내를 강간했다고? 윌리엄 S. 버로스는 아내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다고? 로만 폴란스키는 열세살 소녀를 항문 강간했다고? 큰 틀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게 진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아내가 천재의 발목을 잡으면, 화가 나서 벽난로에 캔버스를 던져넣거나 무의식 속에서 어떤 시구를 떠올리고 있던 남편을 방해해서 그 구절을 아주 사라지게 만든다면 우리는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게 지금것 노라가 문맹, 재미없는 사람, 잡년으로만 그려진 이유일 거다.
🔖 걸으면서 나는 트리에스테에 정착하여 이 여관을 사들이고 위대한 여행가였던 버턴의 이름을 붙이는 상상에 빠진다. 이곳에 정착한다면 나도 나의 걸작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크레이그리스트에 광고를 낼 수도 있다. ‘내 아내가 될 남자를 찾습니다.’
🔖 어머니에게서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비슷한 선택을 한 아무 여자에게나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투영하고 신나게 분노를 토해낸다. 반면 아버지들은 면피권을 받는다. 기대치가 워낙에 낮아서 발레 공연을 천번쯤 빠지고 생일을 열번쯤 까먹고 크리스마스카드에 이름 철자를 틀리게 적더라도 (아빠도 참!) 여전히 존경받는다. 반면 어머니들은 독심술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무얼 필요로 하는지 알아맞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처를 줘서 몇년간 심리치료를 받게 만든다. 리베카의 아들 웨스트 씨는 어머니를 공공연히 비난했으나 항시 자리를 비웠고 경제적으로도 무책임했던 아버지를 존경했다.
🔖 그리고 나는 리베카 웨스트의 책이 다른 책과 어떻게 다른지 깨닫는다. 웨스트의 책에는 여자들이 있다. ... 그들에겐 이름이 있고, 생각과 인생과 욕망이 있다.
…
웨스트와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목적지까지 태워줄지 묻는다.
여인은 대답한다.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걸으면서 어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비평가 메리 만은 이 여인을 <검은 양과 회색 매>의 ‘히어로’라고 부르고, 나도 그에 동의한다. 구경거리가 끝나고 다른 곳에서 벌어진 다른 재난, 비유에 써먹을 만한 다른 분쟁에 관심을 집중하느라 발칸반도에서 시선을 돌린 뒤에도, 사람들은 우리가 보든지 말든지 삶을 살아갈 것이므로. 삶을 버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 행위다.
🔖 마거릿에게 일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 같진 않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삶이었다. 마침내 삶을 쟁취하자,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의 책을 출판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잡지의 의의는 퇴색되었다.
기성 미국 문예계에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변방에서 집을 찾은 건 옳은 판단이었다. 문지기와 취향 생산자, 출판인과 권력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녀는 변해야 했을 테고, 세상에 필요한 건 희석되지 않은, 도수 높은 마거릿 앤더슨이니까.
그녀는 구루를 찾았다. 연주회에 다녔다. 정신 나간 회고록을 썼다. 이성애자 여성을 수없이 유혹했다.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뮤즈가 되기엔 너무 능동적이었다. ... “이 비극적인 분투를 그만두고 평화로운 삶을 사세요.” 예이츠는 무수한 청혼 중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모드에게 있어 분투가 삶의 전부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답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는 것에 온 세상이 감사할 겁니다.”
🔖 우리는 모두 첼로가 되지 못한 우리의 클라리넷을 용서해야 한다.
🔖 “침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래, 거기선 시차가 아니라 존재의 차이에 적응해야 하지. 꼭 낮잠을 자도록.”
🔖 “실망스럽지 않아요? 내 외로움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평생 남자 없이 하루도 살지 못했다는 것 말예요.”
🔖 어쩌면 이런 도시들, 영원하게 느껴지는 이런 도시들, 당신의 런던과 뉴욕과 멕시코시티와 도쿄는 너무 오래 도시로 존재한 나머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비껴서게 된 걸지도 모른다. 단지 지금의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존재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도시는 오늘의 런던이 아니라 영원의 런던, 과거와 미래와 실재와 상상의 런던이다. 런던이 냉혹한 건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짚신벌레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하늘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우리는, 현미경을 올려다보며 전능한 신의 깜박이지 않는 눈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짚신벌레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이 이 도시를 여는 열쇠다. 거대한 도시가 개개의 단위로 바뀌어 내게 열린다. 군중은 제각기 희망과 욕구와 일상을 지닌,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들로 화한다. 이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단순한 선형적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평행우주에서 다른 평행우주로 발을 내딛는 행위다. 매 순간을 고심하고, 이해해야 한다. 당신의 바로 뒤에서 걷는 사람 역시 자신의 순간들을 여행하고 있다. 유약한 정신이 이런 이행을 견디지 못하고 균열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방향을 잡아줄 자연적 표지가 거의 없고 침범할 수 있는 현실이 이토록 적은 곳에서, 현실이 하나가 아닌 곳에서, 지치고 취약한 사람들이 부서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무한과 끝없는 가능성의 개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모든 걸 개개의 단위와 이야기로 조각낸다. 그러고는 공교롭게도 그 이야기를 믿고 그대로 연기하기 시작한다.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 남자가 어떻고 여자가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빚지 못해서 남들의 이야기에 감염되길 택하고, 이야기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불편한 부분은 무시하려 한다.
🔖 노래나 책이나 시가 자기 인생을 구했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이렇다.
- 내 머릿속에 갇혀 있던 나를 구해서 그 찰나에 다시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 저 멀리로 불씨 하나를 쏘아주어 그것을 단서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전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왜냐면 자살은 상상력의 죽음에서 비롯되니까. 가능한 다른 미래를 꿈꾸는 방법을 잊는다, 새로운 작전과 새로운 길을 그릴 수 없다, 모든 게 비극적 현재일 뿐이라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들이 우리를 죽이는 생각이다.
우리를 구하는 건,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다르게 사는 방법의 이야기다.
🔖 나를 구해줄 것을 돌려보낸 적이 몇 번인가? 내게 주어졌으나, 보지 못하거나 거절한 선물들. 나는 나를 받아줄 가족을 찾아 나섰다가 그 대신 유령으로 가득한 서재만 발견했다. 집을 찾으러 나섰다가, 그 대신 세상을 발견했다.